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본토 공습 (문단 편집) ==== 교토 ==== 교토가 공습과 원폭 투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문화재 보호의 목적이 컸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었다는 이유의 실제 언급은 원자폭탄 표적선정 위원회의 1945년 5월 30일 회의. 맨해튼 계획 책임자 그로브스 장군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특히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은 당대 미국인 중에선 보기 드물게 일본 경험이 꽤 많은 사람이었고, 1920년대 필리핀 총독 부임 당시 여러차례 일본을 방문했는데, 특히 교토의 학구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 때문에 핵폭격 표적 관련 논의 현장에서도 '''아름다운 교토'''를 파괴하지 말자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이 오히려 '''"[[인종차별|일본인들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나마 문화인인 교토 시민들이 아니면 핵폭격의 의미조차 못 깨달을 거다]]"'''라고 반론할 정도였다.[* 육군 장관 헨리 커티스 르메이는 '''교토야 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스팀슨에게 격렬하게 항의했으며 뒤이어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도 이를 두고 스팀슨과 갈등을 빚었다. 다만 후술하듯 르메이는 교토를 재래식 폭격하지 않는 이유를 전혀 모르면서 작전 수행을 한 반면 그로브스는 교토의 핵 투하를 두고 스팀슨과 대립한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소 다르다.] 결론적으로 교토가 재래식 공습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향후 핵폭격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고 최종적으로 핵폭격 대상에서 벗어난 건 스팀슨 개인의 의견이 주효했다. 그는 교토를 지키기 위해, '''"맨해튼 계획에서 내가 최고 책임자였던 일은 아직 없지만, 이 일만은 내가 결정권자다. 당신들은 내게 보고서만 가지고 오면 된다."'''라고 말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이후 투하 직전까지 그로브스와 거의 매일같이 교토 핵폭격 문제로 싸움을 거듭했다. 아무리 그로브스가 극비 프로그램의 책임자로서 막강했어도 일개 젊은 투스타 장성이 전체 육군을 책임지는 아버지뻘의 육군 장관에게 함부로 대들 수 없었다. 그래서 훗날 교토부지사와 교토시장이 스팀슨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참배를 올렸다. 교토가 폭격에서 제외된 다른 이유는 본토 결전 계획이나 향후 연합국의 일본 통치에 있어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단지 미국이 일본의 문화유산을 지켜주기 위함만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미국 정부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이유였다. 교토는 고중세 [[헤이안 시대]]부터 근대 [[메이지 시대]] 초까지 1,00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였으며 전쟁 시점인 1940년대에는 수도 지위를 잃은 지 불과 7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교토는 단순히 도쿄, 오사카, 나고야와 같은 '대도시1'이 아니라 일본 문화와 역사를 응축한 고도(古都)이자, '''[[지역 갈등/아시아/일본#s-1|언젠가 덴노가 다시 돌아올 고향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하다.]]''' 이렇게 상징적인 도시가 미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다면 오히려 일본인들의 저항 의지에 불을 붙일 지 모른다는 판단이 있었고, 일본 본토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추후 비협조적으로 나올 수도 있기에 따라서 미국 역시 교토 폭격으로 잠재적 부담을 안기 보다는 안전하게 다른 공업도시를 노리는 방안을 선택했다. 이외에도 교토에 폭격할 만한 산업시설이 많지 않아서 순위가 밀렸다는 관측도 있지만 교토는 당시 일본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대도시로서 많은 산업시설 및 대학시설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술했듯 1945년 6~8월에는 교토와는 비할 수도 없이 작은 중소도시들에도 B-29가 대거 출현했기 때문에 교토만 놔둘 이유도 없었다. 다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교토에 대한 폭격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5년 1월 16일, 3월 19일, 4월 16일, 5월 11일, 6월 26일의 공습이 대표적. 총 폭격 회수는 20회가 넘으며, 이중 5월 11일에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황궁인 [[교토고쇼|교토 어소(京都御所)]]를 폭격하기도 했다.[* 단, 도심 폭격을 우려한 일본 측에서 교토고쇼를 해체한 후 따로 보관했기 때문에 주요 전각들은 폭격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교토대 이화학 연구소(京都大理化学研究所)는 당시 '''일본 원자폭탄 개발계획의 중추''' 중 하나였으며 해군의 직접자금지원을 받아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대의 [[사이클로트론]](입자 가속기)이 건설 중이던 곳이었고, '''당연히 폭격을 받았다.''' 5월 11일 공습을 제외하면 전부 저런 대학 연구소를 노린 폭격이었다. 다만 교토 시내에 대한 포격 강도가 분명 타 도시들의 그것에 비해 현격히 약했던 것은 사실이며 교토의 유수한 문화유산이 남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